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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均瀅

均瀅

1896 ~ 192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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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均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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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수안(遂安)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황해도 수안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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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2013)

관련 사건

  • · 수안군 수안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13) 황해도 수안군(遂安郡) 대천면(大千面, 현 연암면) 양곡리(暘谷里) 출신이다. 일제 측 판결문에는 1920년 당시 25세로, 1896년생으로 추정된다. 자료의 부족으로 가족관계와 학업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으나 만세운동 당시 농업에 종사한 것은 확인된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을 시작으로 평양·안주·의주·선천·원산·진남포 등에서 일제히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천도교 중앙총부는 각 지역의 천도교구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지시하였다. 서울 천도교 중앙총부 월보과장(月報課長) 이종일(李鍾一)의 지시를 받은 황해도 곡산군(谷山郡) 곡산면(谷山面) 남천리(南川里)에 살았던 천도교도 이경섭(李景燮)은 3월 1일 저녁에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遂安面) 석교리(石橋里)로 갔다. 그 곳에서 수안지역 천도교 교구장이었던 안봉하(安鳳河)를 비롯한 천도교 인사들에게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였다. 이와 함께 독립선언서 70장을 배포하며 만세운동을 일으키라는 중앙총부의 지령도 전달하였다. 수안 천도교구 인사들은 3월 2일에 수안 천도교구실에 모여 회의를 가졌다. 그 자리에서 천도교 중앙총부의 지령에 호응해서 3월 3일에 수안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그런데 일제의 헌병분대가 이 사실을 미리 탐지하고 교구실에 모인 안봉하 등 천도교 인사를 구금하였다. 일제의 구금을 면한 이영철(李永喆)·홍석정(洪錫禎)·한청일(韓淸一)은 다시 모임을 갖고 예정된 3월 3일에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회의에 참가한 이들은 각자 흩어져 만세계획을 전파하였다. 홍석정은 김하경(金河京)·오병선(吳炳善)을 찾아가서 시위 계획을 알리면서 3월 3일 새벽에 수안면에 나오도록 약속하였다. 수안 천도교구실 소사(小使)였던 이영철은 홍석정과 한청일의 지시를 받고 천도교 전도사 강국보(康國甫)를 비롯한 천도교인들에게 만세시위 계획을 전달하고 참여를 독려하였다. 오관옥(吳觀玉)도 천도교인들을 만나서 3월 3일의 만세시위 계획을 알리고 그들의 참여를 이끌어 냈다. 많은 수안 천도교 인사들이 만세시위 독려에 동의하였다. 만세시위 거사 당일인 3월 3일 오전에 천도교구실로 갔다. 이미 수안교구에는 수안군 내 천도교인들이 집결해 있었다. 이 중 오관옥은 수안군 대천면 사리원(沙里院) 전교실에서 김원걸 등에게 수안군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될 것이라는 계획을 전하고 이에 참여할 것을 독려함과 동시에 이들과 함께 수안교구로 이동하였다. 또 이동욱(李東郁)은 수안면 수촌리(秀村里, 현 서평리) 전교실에 모인 천도교인들을 이끌고 수안교구로 집결하였다. 이시용(李時庸)과 임창운(林昌云)은 도소면(道所面, 현 연산군)의 천도교인 40여 명과 함께 수안교구에 이르렀으며, 수안면 창후리(倉後里, 현 수안읍)의 이두천(李斗闡)은 5~10명의 교인과 함께 수안교구에 도착하는 등 인근 지역의 교인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수안교구에 모인 사람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헌병분대 퇴거를 요구하는 결의를 다졌다. 오전 11시 경 1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수안교구를 출발하여 헌병분대 앞으로 가서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헌병분대의 퇴거를 요구하였다. 분위기가 고조되자 시위대를 이끌던 이동욱이 천도교인 몇 명과 함께 헌병분대 사무실로 진입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당황한 헌병분대는 이동욱 등을 향해서 무차별 발포 사격을 가함으로써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후 홍석정·한청일·오관옥은 오후 1시에 오전보다 많은 150여 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헌병분대로 전진하였다. 그 곳에서 시위대는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헌병분대 사무실로 재진입을 시도하였다. 그러자 헌병분대는 또다시 시위대를 향해서 발포를 하였으며, 그 때 시위대를 선두에서 이끌었던 홍석정·한청일은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 오관옥도 시위 현장에서 총에 맞고 쓰러졌다. 일제의 무차별 발포로 인해 수안군에서 시위가 격렬해지자 당황한 일제 헌병분대는 야경단(夜警團)을 조직하여 시위대를 진압하고자 하였다. 상급부대에 증원을 요청한 것이었다. 다음날인 3월 4일 일본군 보병 소대 약 20명이 수안에 진군한 것을 시작으로 같은 달 11일에는 용산(龍山)에 주둔하였던 1개 중대 100여 명이 추가로 파견되어 왔다. 수안군 내 일제 군경병력의 증파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한 이들에 대한 검거가 본격화되었고, 3월 7일 일제 군경에 붙잡혔다.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는 과정에서 내란죄 적용 문제를 두고 오랜 조사와 공판이 이어졌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내란죄가 적용되지 않게 되면서 관할 재판소가 경성지방법원으로 지정되었다. 같은 해 8월 7일 경성지방법원은 이른바 보안법위반, 소요죄, 저택침입 등을 적용하였으나, 변호사들의 사법 절차 문제 지적 등 법정투쟁 결과 공소 불수리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재판이 진행되던 도중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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