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光洙
光洙1885. 3. 2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1)
관련 사건
- · 1919년 덕천군 덕천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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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1) 1885년 3월 2일 평안남도 평원군(平原郡) 한천면(漢川面) 감일리(甘一里)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였다. 덕천군(德川郡) 잠도면(蠶島面) 대평리(大坪里)에 거주하였으며 덕천군 덕천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덕천군 만세시위는 3월 5일부터 덕천면 읍내 장터에서 시작되어 7일까지 읍내를 중심으로 연이어 전개되었다. 3월 4일 이미 다음 날 덕천 읍내에서 만세운동을 할 것이라는 소식이 여러 사람에게 공유되었으며, 김사진(金泗振)·방효준(方孝俊)이 덕천군의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또한 천도교와 기독교가 주축이 되어 덕천 천도교구 공선원(共宣員)인 현성재(玄聖才)가 기독교 측과 연락을 주고 받으며 신중히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3월 5일 오후 천도교인과 기독교인 40여 명이 천도교구당 앞에 모여서 독립선포식을 열었다. 김사진·방효준 등이 한국 독립에 관한 연설을 한 후 시위대와 함께 거리로 나가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인쇄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출동한 덕천헌병분대 헌병들은 3~4명을 체포하면 만세시위가 잦아들 것이라고 예상하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참여자가 불어나 시위대는 300명 정도로 증가하였다. 이에 일제 헌병은 50여 명을 검거하고 평양에 병력을 요청하였다. 이후 붙잡혀 평양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6월 7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오랫동안 조선의 독립을 희망해오던 중 신문에서 민족자결주의에 관한 내용을 듣고 기쁨을 견디지 못하고 만세를 불렀다. 민족자결은 우리 민족의 의무로서 우리의 나라를 되찾으려는 것이니 하등의 죄라 말할 수 없다”라며 상고하였지만, 7월 21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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