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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寬鎭

寬鎭

1862. 9. 18 ~ 1935.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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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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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양양(襄陽)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강원도 양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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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3)

관련 사건

  • · 1919년 양양군 양양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13) 1862년 9월 18일 강원도 양양군(襄陽郡) 양양면(襄陽面) 감곡리(甘谷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4일 양양면 읍내 장터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마을 주민들을 이끌고 참여하였다. 양양면 만세시위는 양양교회 청년부가 중심이 된 기독교 감리교 측과 함평 이씨(咸平 李氏)를 중심으로 동시에 추진되었다. 감리교 측에서는 3월 말경 개성(開城) 호수돈여학교(好壽敦女學校)에 재학 중인 조화벽(趙和璧)으로부터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받은 김필선(金弼善)이 김재구(金在龜)·김계호(金啓鎬)·김봉운(金鳳運) 등 교회 청년들을 모아 4월 4일 양양면 읍내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펼치기로 하고 준비하고 있었다. 한편 이석범(李錫範)이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져온 것이 계기가 되어 임천리(林泉里)를 중심으로 이교정(李敎貞)·이건충(李建忠) 등 함평 이씨 문중 사람들과 최인식(崔寅植) 등 청년들이 모여 양양면 읍내에서 장이 서는 4월 4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만세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두 계열은 거사 하루 전날인 4월 3일 김필선과 최인식이 서로 만나면서 통합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마을마다 책임자를 두고 주민들을 동원하도록 하였다. 이때 아들 이원도(李源燾)·이원희(李源熙)와 함께 감곡리를 맡기로 하고, 주민들을 만나 만세시위 계획을 알리며 동참을 호소하였다. 이날 저녁 양양군수 이동혁(李東赫)이 임천리를 급습하면서 이석범·이건충 등을 체포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압수하였지만, 만세운동은 그대로 추진되었다. 거사 당일인 4월 4일 아침, 두 아들과 함께 북쪽 통로로 감곡리 주민들을 이끌고 장터로 향하였다. 서쪽 통로에서는 최인식·이종태가 거마리(車馬里)·임천리 주민들을 이끌었고, 동쪽·남쪽·서남쪽에서도 각각 최영덕(崔永德)·신세묵(辛世黙)·노병우(盧炳禹) 등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주민들과 함께 양양면 읍내 장터로 모여들었다. 이미 양양면 읍내 장터에는 만세시위를 위해 모인 주민들과 장날을 맞아 나온 장꾼들까지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오전 11시경, 최인식이 군중 앞으로 나와 ‘독립만세’를 외치자, 군중과 함께 목청껏 독립만세로 화답하였다. 주도자들과 같이 선두에서 주민들을 이끌고 태극기를 흔들며 장터를 행진하였다. 오후에는 인근 마을 주민들까지 만세시위에 합류하면서 시위대의 규모는 점점 더 커졌다. 이에 힘입어 주도 인사들은 전날 체포된 22명의 석방을 놓고 교섭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손양면(巽陽面) 가평리(柯平里) 구장(區長) 함홍기(咸鴻基)가 사법주임의 칼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소식에 분노하여 군중과 함께 무력항쟁으로 돌아섰으며, 밤늦게까지 만세시위를 이어갔다. 밤을 틈타 일제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사격하자 권병연(權炳淵)과 김학구(金鶴九)가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고, 노병우·박의병·김경숙(金敬叔) 등이 부상당하였다. 이후 일제 경찰에 붙잡혔고, 1919년 4월 21일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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