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啓燁
啓燁1889. 8. 30 ~ 1937. 9. 11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합천군 삼가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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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9년 8월 30일 경상남도 합천군(陜川郡) 백산면(栢山面) 하신리(下新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이치옥(李致玉)이다. 1919년 3월 18일과 23일 합천군 삼가면(三嘉面)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백산면의 대표로 상백면(上栢面)의 정인표(鄭演彪), 가회면(佳會面)의 윤재현(尹在鉉) 등과 연합하여 3월 18일 합천군에서 처음으로 거행된 삼가시장 만세시위를 주도적으로 계획하였다. 먼저 서울에서 유학하던 이언영(李愿永)으로부터 만세운동 소식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전달받고, 백산면에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그 과정에서 비슷한 경로로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은 상백면과 가회면에서도 정인표와 윤재현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은밀하게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정인표의 주선으로 3개 면이 함께 거사를 도모하기로 하고, 거사일은 장날인 3월 18일로 정하였다. 그리고 만세시위의 선두에 세울 큰 태극기와 참여자들이 사용할 작은 태극기 등을 제작하였다. 3월 18일 만세시위 직전에 정인표·윤재현·공민호(孔敏鎬)·정각규(鄭恪圭) 등과 함께 삼가시장에서 주점을 하고 있던 박흥대(朴興大)의 집에서 최종적으로 거사 점검을 위한 회합을 가졌다. 오후 1시경 정인표가 삼가시장 전면의 중앙 언덕위에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선창한 것을 신호로, 정각규·공민호 등과 선두에 서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후 시위 군중과 함께 삼가시장 곳곳을 누비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저녁 무렵부터 만세시위가 격화되는 양상을 보이자, 합천경찰서장이 직접 일제 경찰과 일본인 재향군인 등을 지휘하며 폭력적으로 시위대를 진압하였다. 오후 8시경 시위대는 해산하였고, 함께 만세시위를 주도하던 정인표·공민호·정각규·한필동(韓弼東) 등이 체포되었다. 몸을 피한 다른 주도자들과 함께 삼가시장의 다음 장날인 3월 23일 다시 대규모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300~400명이 참여한 3월 18일 만세시위가 작았다고 판단하고, 23일의 만세시위에는 대규모로 사람들이 모일 수 있도록 각 지역을 돌며 조직적으로 주민들의 참여를 권유하였다. 3월 23일 백산면에서만 이른 아침부터 모인 3,000여 명을 이끌고 면사무소를 공격한 후, 상백면의 참여자들과 함께 삼가면으로 이동하였다. 당시 삼가면 읍내 객사(客舍) 바깥채인 정금당(淨襟堂)에 집결한 시위 군중은 백산면·상백면·가회면 등 합천군의 각 지역과 인근 의령군 주민까지 포함하여 13,000여 명에 달하였다. 오후 3시경 정금당 앞에서 일제를 규탄하는 대회가 열려 각 지역의 대표자와 시위 주도자들이 식민통치를 성토하는 연설을 하였고, 군중도 이에 호응하여 만세를 불렀다. 이어서 연설하던 임종봉(林鐘鳳)을 향해 일제 헌병이 총격을 가하자, 이에 흥분한 시위 군중은 곤봉·낫·호미 등을 들고 주재소·우편소 등으로 쇄도하였다. 시위대의 위세에 눌린 일제 군경은 다시 군중에게 무차별적으로 총을 난사하여, 현장에서만 13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부상당하는 참극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폭압적인 진압으로 시위대는 해산하였고, 결국 주도자들과 함께 붙잡혔다. 이후 김태현(金台鉉)·윤규현(尹圭鉉) 등 다른 주도자들과 함께 가혹한 심문을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이 일로 1919년 12월 24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소요죄와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년을 받았다. 이는 합천군 만세시위로 재판을 받은 인사들 가운데 가장 무거운 형량이었다. 이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다가 1920년 감형되었고, 1921년 12월 24일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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