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啓聖
啓聖1900. 4. 20 ~ 1976. 11. 2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건국포장(1996)
관련 사건
- · 1919년 서산군 해미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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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포장(1996) 1900년 4월 20일 충청남도 서산군(瑞山郡) 해미면(海美面) 기지리(機池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함평(咸平)이다. 해미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해미저축조합에서 서기로 근무하였다. 1919년 3월 24일 해미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해미면에서는 3월 19일 남상철(南相喆)의 주도로 다수의 주민들이 참여한 만세시위가 있었다. 이후 3월 24일 해미공립보통학교 졸업생과 재학생, 기독교도 등이 함께 참여하는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김관룡(金寬龍)과 함께 이를 주도하였다. 평소 독립을 희망하며 강한 항일의식을 가지고 생활하던 중, 천주교인 한병선(韓炳善)과 서울에서 온 정(鄭) 신부로부터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얻었다. 그리고 해미면에서의 만세시위에 사용하기 위해, 숙직을 하며 저축조합의 기자재를 이용해 다량의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3월 24일 저녁 홀로 만세시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해미공립보통학교의 졸업생 고별식(告別式)에 다수의 졸업생과 재학생들의 모임이 예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별식이 열리기 전 졸업생 학급반장이었던 김관룡을 찾아가 “다른 학교에서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교에서만 만세운동을 전개하지 않음은 매우 유감이다. 오늘밤 우리 학생들과 기도교도들이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하자”고 권유하고, 동의를 얻었다. 그리고 졸업생이자 기독교도인 유세근(柳世根)과 김병선(金炳善)의 집으로 각각 찾아가, 만세시위의 취지를 알리고 동참할 것을 호소하여 기독교계 인사들의 참여를 약속받았다. 3월 24일 저녁 7시경 박선양(朴宣陽)이 운영하는 읍내의 음식점에서 예정대로 해미공립보통학교 졸업생 고별식이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서 김관룡은 참석자들에게 오늘 밤 만세시위가 전개될 것이라는 계획을 알리고, 고별식 행사가 끝난 후 모두 함께 만세시위에 동참하자고 역설하였다. 이에 졸업생 이봉이(李鳳伊)·유한종(劉漢鍾)·최흥량(崔興良), 재학생 장기남(張基南)·양태준(梁泰準)·이기신(李起信) 등 참석자 전원이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적극적으로 동의하였고, 고별식에 참석하지 않은 다른 학생들에게도 만세시위 계획을 전파하며 참여를 독려하였다. 졸업생 고별식이 끝난 밤 11시 경부터 학생들과 기독교계 인물들이 속속 만세시위 참여를 위해 모이기 시작하였다. 김관룡과 함께 이들 수십명을 지휘하여 읍내 뒷산으로 올라갔다. 산 위에서 횃불을 밝히고 준비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일제히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산 위의 횃불만세시위를 통해 만세시위의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린 뒤, 김관룡과 함께 이들을 지휘하여 시위대열을 갖추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읍내로 내려와 면소재지 곳곳을 행진하였다. 그리고 읍성의 남문과 서문을 지나 면사무소 앞과 우시장(牛市場)으로 가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주민들까지 동참하여 불어난 시위대를 이끌고 해미주재소를 향해 행진하던 중 저지하는 일제 경찰과 충돌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일제 경찰의 즉각 해산 명령에도 불응하며 만세시위를 계속 전개하였지만, 강압적인 무력 탄압으로 결국 해산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관룡·유세근·김연택(金然澤) 등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혀 서산경찰서(瑞山警察署)로 연행되었고, 조사 이후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21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협박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4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항소 취하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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