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卿欽
卿欽1874. 9. 19 ~ 1919. 3. 2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1919년 함안군 군북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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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1) 1874년 9월 19일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가야면(伽倻面) 광정리(廣井里)에서 태어났다. 호(號)는 상진(尙眞)이다. 1919년 3월 20일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郡北面)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사망하였다. 함안 지역의 만세운동은 고종 국상에 참여하고 돌아온 지역 인사들이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면서 시작되었다. 고종 국상 참여했던 조한휘(趙漢輝)·한관열(韓灌烈) 등은 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지참하고 돌아와, 군북면 사촌리(舍村里) 조용대(趙鏞大)의 사랑채에서 지역 인사들과 회합하였다. 이 자리에는 3월 19일 함안 읍내 만세시위를 추진하던 가야면 검암리(儉巖里)의 이희석(李喜錫)도 참석해, 읍내 만세시위에 군북면 주민들의 동참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참석자들은 이를 수락함과 동시에 이튿날인 3월 20일 군북면의 군북시장에서도 독자적으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군중 동원, 독립선언서 등사, 태극기 제작, 일제 경찰과 밀정의 동향 감시 보고 등 거사 준비를 위한 구체적인 업무도 분담하였다. 이때 산서리(山西里)에 거주하는 박주범(朴注範)과 묘사리(苗砂里)에 거주하는 집안 동생 이경민(李卿敏) 등과 함께 가야면의 군중 동원을 담당하였다. 이처럼 군북면 만세시위는 전날 일어난 함안 읍내 만세시위와 연속선상에서 계획되고 실행되었다. 함안면 만세시위 당일인 3월 19일 정오 비봉산(飛鳳山)에서 거행된 고천제(告天祭)와 태평루(太平樓)에서의 독립선언식에 참석하였고,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함안경찰관주재소로 나아갔다. 일제 경찰의 폭력적 진압에 맞서 투석전을 감행하는 한편, 함안우체국과 함안공립보통학교 등을 점령하고 기물과 집기를 파손하였다. 일제 경찰은 경찰력만으로 시위대의 진압이 어려워지자 군에 병력 지원을 요청하였고, 마산 중포병대대 21명이 급파되었다. 이어서 일제 군경의 폭력적인 진압이 시작되자, 다음날 군북면 만세시위를 위해 동촌리(東村里)에 거주하는 사촌동생 이원필(李元弼)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3월 20일 오전 9시부터 동촌리 신창학교(新昌學校) 교정에서 시작된 군북면 만세시위에 참석하였다. 학생 5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고,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이 진압에 나서면서 시위 군중은 해산하였다. 이후 군북장터로 이동하여 오후 1시 경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만세시위에 동참하였다. 함안 각 지역에서 모인 사람들로 시위대는 5,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위기를 느낀 일제 군경은 또 다시 폭력적 진압을 통해 시위대를 해산시키려고 하였다. 하지만 시위대는 투석전으로 맞서며 군북면사무소와 경찰주재소를 향해 진격하였다. 결국 위협을 느낀 일제 군경의 실탄 사격으로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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