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璟鎬
璟鎬1890. 6. 17 ~ 1919. 6. 1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하동군 하동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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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0년 6월 17일 경상남도 사천군(泗川郡) 곤명면(昆明面) 금성리(金城里)에서 태어났다. 이후 하동군(河東郡) 고전면(古田面) 성천리(城川里)로 이주하였다. 본관은 합천(陜川)이다. 이명은 이경호(李景鎬·李敬鎬), 기옥(基玉), 농은(農隱), 성재(城齋)이다. 한학을 수학한 유학자이자 교육자로 마을에서 성천서당(城川書堂)을 운영하였고, 농업에도 종사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학생들에게 항일의식을 설파하던 중, 일제의 압박으로 인해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도피해 6년 정도 거주하였다. 1919년 3월 23일 하동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서울에서의 3·1운동 소식을 듣고 양보면(良甫面)의 일신학교 교사이자 처남인 정섬기(鄭暹基)와 정성기(鄭成基)·정이백(鄭伊伯) 등과 뜻을 같이하여 하동면 읍내에서 장날인 3월 23일 만세시위를 펼치기로 계획하였다. 그리고 정섬기가 입수한 독립선언문을 등사하고, 태극기 10개를 준비하였다. 3월 23일 만세시위가 거행될 읍내 시장 일대는 일제 경찰의 감시가 삼엄하였다. 이는 3월 18일 이미 적량면(赤良面) 면장인 박치화(朴致和)가 주도한 만세시위가 읍내 시장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정섬기·정성기 등과 함께 일제 경찰의 감시망을 피해 시장 안으로 들어가, 군중들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만세를 외쳤다. 이에 장터에 있던 사람들이 합세하여 500여 명에 달하는 군중들과 함께 만세를 외쳤다. 이에 일제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며 곤봉과 총검으로 진압하여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만세시위의 주도자로 지목되어 붙잡혔고, 하동경찰서에서 모진 고문을 받은 뒤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28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지만 취하하였고, 5월 24일 형이 확정되어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붙잡힌 이후 계속된 일제 경찰의 모진 고문과 가혹한 수형생활로 건강이 악화되어, 1919년 6월 10일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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