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敬洙
敬洙1892. 1. 15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2)
관련 사건
- · 1919년 안성군 읍내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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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2) 1892년 1월 15일 전라북도 옥구군(沃溝郡) 미면(米面) 경장리(京場里, 현 군산시 수송동)에서 태어났다. 이후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읍내면(邑內面) 서리(西里, 현 안성시 안성동)로 이주하였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부영경수(富永敬洙)로 고쳤다. 직업은 생선장수(魚商)였다. 1919년 3월 30일과 4월 1일 경기도 안성군 읍내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조선시대부터 상업의 요충지로 번창했던 안성은 개항 이후 유입된 일본인들에 의해 상권이 침탈되면서 항일의식이 아주 높아져 있었다. 안성군에서의 만세운동은 3월 11일 양성면(陽城面)과 읍내면에서 각각 전개된 이후 4월 초까지 이어졌다. 평소에 일본의 한국 병탄과 식민통치가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하다가 1919년 3월 30일과 4월 1일 안성군 읍내면의 안성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30일 미리 제작한 태극기를 들고 동리(東里)·서리·장기리(場基里) 일대를 행진하며 해당 주민들의 참여를 권유하였다. 만세시위에 참여한 주민들이 500~600여 명으로 불어나자, 오후 7시경 이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읍내를 행진하며 일제 순사와 투석전을 벌였고, 안성경찰서·읍내면사무소·안성군청 등을 돌며 만세시위를 이어가다가 오후 11시 30분경 해산하였다. 4월 1일에도 장기리 주민들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후 만세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1919년 5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지만, 6월 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이에 만세운동이 한민족의 당연한 권리이며 보편적 정의·인도의 원칙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다시 상고하였으나, 7월 31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었다.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겪고, 1920년 5월 1일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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