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敬奉
敬奉1894. 9. 9 ~ 1955. 8. 4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7)
관련 사건
- · 1919년 청양군 정산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07) 1894년 9월 9일 충청남도 청양군(靑陽郡) 정산면(定山面) 광생리(光生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이교봉(李敎鳳)이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4월 5일 청양군 정산면 정산시장과 6일 목면(木面)으로 이어진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정산면의 만세운동은 1919년 4월 5일의 정산시장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다음날인 6일에는 목면에서 전개되었다. 정산시장의 만세시위는 홍범섭(洪梵燮)을 중심으로 임의재(任毅宰)·윤석희(尹錫禧)·홍세표(洪世杓)·박상종(朴商鍾) 등 백곡리(白谷里)의 인물들이 주도하였다. 홍범섭 등은 면사무소 소재지인 서정리(西亭里) 정산시장의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만세운동을 추진하였다. 홍범섭 등은 4월 5일 오후 3시 경부터 정산시장에 있던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배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시위를 시작하였으나, 곧바로 출동한 일제 헌병에게 붙잡혀 청양헌병분견소(靑陽憲兵分遣所)로 강제 연행되었다. 이를 보고 분노하여 주변의 다른 주민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700여 명으로 확대된 시위대는 정산향교(定山鄕校) 직원(直員) 권흥규(權興圭)의 지휘에 따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헌병분견소로 달려가서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일제 헌병들은 이러한 요구를 거부하고, 오히려 시위대의 즉시 해산을 명령하였다. 이에 크게 자극받은 권흥규가 시위대의 선두에서 체포된 주도자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하다가, 일제 헌병의 총격으로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이러한 일제 군경의 탄압으로 시위대는 해산하였고, 만세시위는 다음날 목면으로 이어졌다. 4월 6일 아침 시신 운구를 위해 권흥규의 친인척과 전날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모이면서 대규모의 운구행렬이 형성되었다. ‘배일사권공지구(排日士權公之柩)’라는 명정(銘旌)과 다수의 만장(輓丈)을 앞세운 운구행렬에 동참하였고, 고인의 자택이 있는 목면 안심리(安心里)로 함께 이동하였다. 목면으로 가는 길목의 마을마다 노제가 진행되었고, 많은 주민들이 운구행렬에 동참하였다. 오후 5시경 지곡리(池谷里)를 지나갈 즈음부터 운구행렬의 통곡소리는 ‘대한독립만세’라는 구호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1,000명으로 규모가 불어난 운구행렬이 밤에 되서야 안심리에 도착하자, 이에 대한 보고를 받은 일제 군경은 추가로 공주에 주둔하고 있던 헌병과 보병 등을 급히 출동시켰다. 안심리에 도착한 일제 군경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운구행렬과 충돌하였고, 맞대응하며 공격하는 시위대를 향해 다시 무차별적으로 발포하였다. 그 결과 권흥규의 조카딸 최윤안(崔胤安), 명정을 쓴 권영진(權寧鎭), 상여꾼 김국삼(金國三)과 유행길(柳行吉) 등이 일제 헌병의 총격으로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도 발생하였으며, 시위군중들도 해산하였다. 이후 만세시위 참여자 색출에 나선 일제 헌병에게 붙잡혀 즉결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22일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아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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