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학소
尹學昭1898. 3. 13 ~ 1927. 12. 22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광제청년단
- · 대한청년단연합회
- · 광복군총영
포상 정보
- · 애국장(1995)
관련 사건
- · 1919년 의주군 광평면 만세운동
- · 광제청년단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5) 1898년 (음)3월 13일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광평면(廣坪面) 하광동(下廣洞)에서 윤형석(尹珩錫)의 5형제 중 넷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관명(冠名)은 윤하정(尹河正)이며, 자(字) 학소(學昭)이다. 맏형인 윤하범(尹河範)은 제령위반(制令違反)으로 처형당하였고, 둘째·셋째 형인 윤하진(尹河振)·윤학승(尹學昇), 고종사촌인 백봉집(白鳳輯)과는 독립운동을 함께 하였다. 부인 태인 백씨(泰仁白氏)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 차남 윤홍식(尹弘植)은 징병(徵兵)을 당해 전사하였다. 1919년 고향인 광평면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6월 오동진(吳東振)의 주도로 장덕진(張德振)·박태열(朴泰烈)·윤학승 등이 중국 남만주 콴뎬현(寬甸縣)에서 조직한 광제청년단에서 활동하였다. 광제청년단은 1919년 11월 대한청년단연합회로 통합되어, 광복군총영의 모체가 되었다. 광복군총영은 주로 국경 지대를 중심으로 일제의 공공기관 파괴와 친일 주구 처단에 주력하였다. 특히 산하의 천마별영(天摩別營)과 벽파별영(碧婆別營)은 각각 평북 의주군의 천마산(天摩山)과 벽동(碧潼) 및 파저강(婆猪江) 일대의 산림지대를 중심으로 일제의 국경 치안에 타격을 가하였다. 1920년 (음)5월 21일 오후 10시경, 윤학승·장지환(張志煥)·조태환(趙泰煥)과 의주군 광평면 상광동(上廣洞)에 거주하는 청성(淸城) 경찰관주재소의 밀정 윤창룡(尹昌龍)을 처단하였다. 윤학소는 맏형 윤하범(尹河範)이 창성주재소 순사 이승주(李承疇)와 임용현(林用賢)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하자, 이승주와 임용현이 윤창룡의 집에 함께 있을 때 두 번이나 급습하였으나, 이들이 몸을 피하는 바람에 실패하였다. 이에 다른 대원들과 함께 윤창룡의 집밖에서 경계를 보고, 윤학승이 집 안으로 들어가 권총으로 윤창룡을 사살하였다. 이후 동지들과 광평면 하광평동(下廣坪洞)에 있던 백봉집의 집에 은거하였으며, 부근을 수색하던 청성경찰서 순사 3명과 장시간 교전하기도 하였다. 1923년에는 평북에서 윤학승·백봉집 등과 함께 선천군청과 신의주역에 폭탄을 던지는 의거에 참여하였으며, 권총을 휴대하고 수차례에 걸쳐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25년 가을에는 창춘(長春)에서 백봉집 등과 함께 정미업(精米業)에 종사하며 윤하진(尹河振)과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던 중, 윤하진이 신의주경찰서에 검거되는 과정에서 정보가 누설되어 1926년 9월 13일 백봉집 등과 창춘 일본 영사관경찰서에 붙잡혔다.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되어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예심을 거쳐 재판에 회부되었다. 『중외일보』에서는 “광제단원 삼 형제의 예심 수일 전에야 종결”이라는 기사를 게재하여 그들이 광제청년단의 핵심 단원이었음을 알렸다. 예심이 지연되는 동안 형무소에서 폐결핵에 걸려 병고(病苦)에 시달리자, 친척들이 병보석을 신청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예심 담당판사가 출장 중’이라는 이유로 보석을 허가해 주지 않았고, 일주일만인 1927년 12월 22일 오후 4시 신의주형무소 병감(病監)에서 사망하였다. 당시 『동아일보』는 “30세의 청춘을 일기(一期)로 철창에서 절명”이라고 애도하였다. 이후 윤학승과 백봉집도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살인미수, 강도죄, 강도미수, 공갈 협박, 방화, 폭발물취체(爆發物取締) 위반 등 8개의 죄목으로 재판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황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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