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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南稙

南稙

1920. 4. 8 ~ 2005.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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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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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安東)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안동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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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2006)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6) 1920년 4월 8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풍산면(豊山面) 상리리(上里里)에서 아버지 이준길(李準吉)과 어머니 김덕이(金德伊, 光山 金氏) 사이에서 2남 4녀 가운데 첫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예안(禮安)이며, 자는 덕양(德陽)이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하강의화(下岡義和)로 고쳤다. 경북 안동군 풍북면(豊北面)의 풍북공립보통학교(豊北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고, 1935년 4월에 경북 안동의 안동공립농림학교(安東公立農林學校)에 입학하였다. 1937년 안동농림학교 3학년 재학 중 학교에서 한국인과 일본인 학생에 대한 차별이 행해지는 현실을 보면서 일제의 민족차별정책과 식민지 교육을 반대하고, 식민지에서 벗어나 한국이 독립을 해야 한다는 민족의식을 가졌다.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같은 해 8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경북 문경 출신으로 같은 학교 동기생 송필학(宋必鶴)에게 장래에 함께 문필로써 독립운동을 해 나갈 것을 제의하였다. 송필학이 동의하여 함께 활동 방안을 모색하였다. 1939년 12월에는 같은 마을의 족친(族親)으로 서울의 배재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이해직(李海稙)을 만나 독립운동 방안을 모색하였다. 이해직은 1936년 배재중학교 재학 중 안동 출신으로 서울에서 사회주의운동을 전개하던 권오직(權五稷)과 안기성(安基成)을 만난 후 감화를 받아 독립운동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방학을 맞아 귀향한 이해직을 만나 시국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이해직이 한국의 청소년들이 한국인이라는 자각을 상실하고 있고, 부인들도 국방부인회(國防婦人會),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 등에 가입하여 일제에 협력하는 활동을 하고 있으므로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키우고 독립의 기운을 조성하자는 의견에 동의하였다. 1940년 3월에 안동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예천금융조합 서기로 활동하였다. 1940년 3월 학년말 휴가로 다시 귀향한 이해직을 예천에서 만나 시국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이 자리에서 일제가 한국인을 말살하기 위해 창씨개명을 강제하자 더욱 한국인의 민족의식 함양에 노력하여 독립 실현을 도모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해직이 재차 동의하여 활동 방안을 모색하였으나 구체적인 활동으로 이어지지는 못하였다. 1940년 권오직·이해직 등은 활동 내용이 일제 경찰에 탐지되어 1940년 12월에 붙잡혔다. 아울러 송필학 역시 1941년 3월에 서울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이 사실로 미루어보아 이 무렵에 붙잡힌 것으로 추정된다. 1942년 5월 3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예심이 종결되었고, 1942년 9월 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공주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은 후 1944년 3월 1일에 풀려났다. 풀려난 후 1944년 여름 무렵부터 광복이 될 때까지 경북 영주군청에서 근무하였다. 1958년 청구대학(靑丘大學) 법학과를 졸업하고 경상북도지방공무원교육원의 교수부 교관직 등의 공직을 지냈다. 대한민국정부는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허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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