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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甲孫

甲孫

1872. 7. 12 ~ 1926.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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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甲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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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청양(靑陽)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청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6)

관련 사건

  • · 1919년 청양군 목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06) 1872년 7월 12일 충청남도 청양군(靑陽郡) 목면(木面) 화양리(華陽里)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4월 6일 청양군 목면에서 펼쳐진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목면의 만세시위는 1919년 4월 5일 홍범섭(洪梵燮)·임의재(任毅宰)·윤석희(尹錫禧)·홍세표(洪世杓)·박상종(朴商鍾) 등이 주도한 정산면(定山面) 정산시장 만세시위와 밀접한 관련 속에서 전개되었다. 이날의 만세시위에서 정산향교(定山鄕校)의 직원 권흥규(權興圭)가 일제 헌병의 총격으로 사망하면서, 이를 계기로 4월 6일 목면에서의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정산시장의 장날인 4월 5일 오후, 홍범섭 등 주도자들이 정산시장의 곳곳을 활보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일제 헌병에게 붙잡혀 주재소로 연행되었다. 그러자 시위대는 주재소로 이동하여 연행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때 시위대를 지휘하던 권흥규가 일제 헌병의 발포로 현장에서 사망하고 부상자도 발생하자,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다음날인 4월 6일 아침 일찍부터 권흥규의 가족과 친인척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고인의 시신을 인수하기 위해 정산헌병주재소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운구행렬의 선두에 ‘배일사권공지구(排日士權公之柩)’라는 명정(銘旌)을 세우고, 고인의 자택이 있는 목면 안심리(安心里)로 향하였다. 전날 만세시위의 상황을 전해 듣고 운구행렬이 화양리를 지나갈 때를 기다려 주민들이 행렬에 동참하였다. 이후 운구행렬이 지나는 곳마다 주민들이 동참하여 참여한 사람들의 규모가 시간이 갈수록 증가하였다. 그리고 지곡리(池谷里)를 지날 즈음부터 ‘독립만세’라고 쓰인 깃발이 배포되었고, 통곡 소리는 점차 ‘대한독립만세’의 외침으로 바뀌었다. 이에 그동안 참고 있던 울분이 터져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안심리를 향해 행진하였다. 일제는 만세시위대로 전환된 운구행렬을 해산시키기 위해 정산의 헌병과 함께 공주(公州)의 헌병 및 보병까지 증원하여 시위현장으로 급파하였다. 1,000여 명으로 이른 시위대가 안심리에 도착하면서 출동한 일제 군경과 충돌하였다. 그러자 만세시위를 동반한 대규모 운구행렬에 일제 군경의 발포가 시작되었고, 명정을 쓴 권영진(權寧鎭)과 상여꾼 김국삼(金國三) 등 여러 명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그러면서 만세시위를 하던 군중이 모두 해산하였다. 이후 만세시위 참여자에 대한 일제 헌병들의 색출·검거과정에서 붙잡혀 청양헌병분견소에 갇혔다. 1919년 4월 23일 즉결심판에서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실이 인정되어,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고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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