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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호영

尹滈英

1897. 9. 11 ~ 1960.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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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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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무안(務安)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남도 무안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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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무안군 외읍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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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7년 9월 11일 전라남도 무안군(務安郡) 외읍면(外邑面, 현 무안읍) 성남리(城南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윤호영(尹鎬英)이다. 1919년 3월 20일 무안군 외읍면 읍내 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외읍면의 만세시위는 지역 유지인 정순홍(丁淳紅)과 김순기(金順淇)가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만세운동의 소식을 듣고, 뜻이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며 시작되었다. 3월 19일 늦은 밤, 같은 마을의 김순기 집에서 1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외읍면에서도 만세시위를 일으켜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하였다. 이들은 다음날인 3월 20일 외읍면 장날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정하고, 그 즉시 준비에 들어갔다. 김순기의 집에서 밤새 친일 부역자들의 반성(反省)과 민중의 궐기를 촉구하는 경고문(警告文) 수십 장을 작성하였고, 종이로 같은 크기의 태극기 수십 장도 만들었다. 3월 20일 새벽부터 외읍면 각 지역으로 다니면서 미리 작성한 경고문을 부착해 사람들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오전 10시 경 미리 만나기로 약속했던 외읍면 남산(南山)으로 이동하였다. 주도자 10여 명과 만세시위 소식을 알고 모인 수십 명과 함께 남산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시위대는 남산을 떠나 외읍면 읍내로 행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만세소리를 듣고 동참하는 사람들이 늘었고, 시위대가 무안보통학교(務安普通學校)에 이르자 200여 명으로 확대되었다. 이 곳에서 무안경찰관주재소에서 출동한 일제 경찰들과 대치하다가 다시 방향을 바꾸어 무안 읍내를 행진하였다. 그러면서 장터에 있던 사람들이 합류하여 오후 2시 경에는 시위대의 수가 300여 명으로 더욱 증가하였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일제 경찰들은 무안군수(務安郡守)는 물론, 목포에서 목포경찰서장과 휘하 병력들까지 지원을 나와 시위대와 대치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부 물리적 충돌과 언쟁이 오갔으나, 극단적인 폭력까지는 행사되지 않았다. 이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제 경찰과 대치를 계속하던 시위대는 오후 10시 30분 경 자진 해산하였다. 이후 일제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4월 2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항소를 포기해 형이 확정되었다. 목포분감(木浦分監)에서 1년 넘게 옥고를 겪다가, 1920년 4월 29일 정치범 특사로 목포(木浦)·완도(莞島)·무안·제주(濟州) 출신 인사 14명과 함께 풀려났다. 이때 목포청년들이 다과를 준비하고 덕흥여관(德興旅館)에서 위로회를 개최하여 풀려난 인사들을 환영해 주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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