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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중

尹衡重

1895. 6. 23 ~ 1935.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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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윤형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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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홍성(洪城)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홍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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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홍성군 장곡면 만세운동
  • · 김상옥 의거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5년 6월 23일 충청남도 홍성군(洪城郡) 장곡면(長谷面) 화계리(花溪里)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였다. 친동생인 윤익중(尹益重·世重)·윤낙중(尹樂重·己順) 등과 함께 1919년 4월 4일~8일까지 장곡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장곡면에서는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中央高等普通學校)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윤익중과 경신학교(敬新學校)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윤낙중 형제가 귀향하면서부터 만세시위가 계획되었다. 서울에서 3·1운동에 참여한 윤익중과 윤낙중은 고향에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할 생각으로, 3월 20일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였다. 동생들에게 서울의 만세운동 상황을 자세하게 들은 후, 장곡면에서도 만세시위를 전개하자는 제안에 동의하였다. 그리고 조카인 윤의석(尹宜錫)과 평소 친하게 지내던 윤만수(尹萬洙)·오수남(吳壽男)·이문재(李文載)·최기석(崔奇錫)·최채선(崔彩仙) 등과 함께 장곡면의 만세시위를 추진하였다. 먼저 4월 4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화계리를 중심으로 주변 마을인 광성리(廣城里)·신풍리(新豊里) 등의 주민들에게 만세시위 참여를 호소하였다. 4월 4일 밤 윤익중·윤낙중·윤기석·오수남·이문재·최채선 등과 화계리·광성리·신풍리 주민 100여 명을 이끌고 매봉산으로 올라갔다. 오수남이 종을 치는 것을 신호로 일제히 횃불을 밝히고, 꽹과리와 징을 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여 외치는 횃불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의 만세시위 이후 4월 7일에는 가송리(佳松里)의 김동하(金東河), (東化)를 중심으로 김용제(金用濟)·김동완(金東完)·김용숙(金容肅)·이화춘(李化春)·한상철(韓相喆) 등이 주도하여 새로운 만세시위가 준비되었다. 이날 화계리의 마을 앞산에서 김동하가 소집한 주민 모임에 윤익중·윤낙중·윤기석과 함께 참석하였다. 김동하는 독립의 당위성을 강조하면서 앞서 4월 4일에 전개되었던 만세시위를 계승하여 면사무소 앞에서 더욱 강력하게 시위를 전개하자고 연설하였다. 이에 공감한 주민들과 함께 김동하가 주도하는 만세시위에 동참하였다. 김동하 등의 지휘에 따라 다른 주민들과 함께 만세시위 대열에 참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면사무소 소재지인 도산리(道山里)로 행진하였다. 도산리로 가는 길목에서 만세시위를 목격하고 이에 공감한 광성리와 가송리의 주민들도 합류하였다. 시위대의 규모가 크게 확대되자, 김동하 등은 면사무소에 도착하기 전에 그 뒷산인 응봉산(鷹峰山)에서 일제의 식민 통치를 규탄하고 독립에 대한 열의를 다시 한번 다지는 집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한상철이 나서서 일제 만행을 강력하게 규탄하는 연설을 하고, 독립선언서의 취지를 설명하였다. 그러자 시위대는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고 북을 치며 호응하였다. 응봉산의 집회를 마치고 면사무소 앞에 도착했을 때, 이미 늦은 밤이었기 때문에 면사무소에는 직원들이 퇴근하고 없었다. 그러나 김동하가 “아무리 늦은 밤이라도 면사무소 직원이 한명도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분노하면서 면사무소를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하였다. 시위대의 선두에서 솔선하여 투석하면서 “면사무소를 부수라”고 독려하였다. 이에 김동완·김용숙·이화춘·김차제·한상철·윤기석 등 시위대와 함께 돌을 던지고, 곤봉 등으로 정문 기둥을 부수고 유리창을 깨뜨리는 등 면사무소의 각종 시설과 기물·문서 등을 파괴하였다. 면사무소를 공격하는 등 격렬하게 만세시위가 전개되자, 일제 경찰이 출동하여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면서 무력으로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김동하·윤낙중 등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고, 장곡면의 만세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30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소요죄로 징역 6월과 벌금 30원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8월 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오히려 형량이 2개월 늘어난 징역 8월에 벌금 20원을 받았다. 재차 상고하였지만, 같은 해 10월 18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어 옥고를 겪었고, 1920년 4월 29일 풀려났다. 1923년 1월에는 동생 윤익중을 통해 서울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의열단(義烈團) 김상옥(金相玉)의 의열투쟁을 재정적으로 지원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도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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