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도
尹亨道1871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6)
관련 사건
- · 1919년 대동군 금제면
- · 반석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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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6)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 금제면(金祭面) 이인리(里仁里) 출신이다. 1927년 신문기사에 따르면 당시 나이가 58세로 1871년생으로 추정된다. 1919년 3월 4일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院場里)의 원장시장(院場市場)과 강서군 반석면(班石面) 상사리(上四里)의 사천시장(沙川市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한 아들 윤상열(尹相悅)은 무기징역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사망하였다. 원장시장과 사천시장은 각각 대동군과 강서군(江西郡)에 위치해 있지만, 장날 서로 왕래가 잦았다. 또한 이 지역 장로교 소속의 원장리 원장교회(院場敎會)와 남쪽으로 3km정도 떨어진 산수리(山水里)의 산수리교회, 상사리의 반석교회(盤石敎會)와 10km정도 떨어진 반석면 반육리(班六里)의 사천교회도 활발히 교류하고 있었다. 3월 4일 전개된 만세시위를 기독교인이 주도하면서 두 시장은 만세시위의 중심지가 되었다. 반석교회 장로로 반석학교(班石學校)를 운영하던 조진탁(曺振鐸)은 1919년 3월 1일 평양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에서 거행된 독립선포식과 만세시위에 참여하고 독립선언서 몇 장을 얻어서 돌아오다가, 원장교회의 고지형(高志亨)·윤상열(尹相悅)·차현구(車玄九)에게 평양의 만세시위 소식을 알렸다. 이 자리에서 원장교회와 반석교회는 물론 산수리교회와 사천교회까지 함께 원장시장의 장날인 3월 4일 만세시위를 거행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2일 윤상열 등은 원장교회 부설 합성학교(合成學校) 교감인 임이걸(林利杰)과 산수리교회 간부인 조승익(曺承翊)에게 만세시위 참여를 독려하였다. 차현구는 반석교회 간부 최능현(崔能賢)·백이옥(白履玉)에게, 다시 최능현은 사천교회 송현근(宋賢根) 목사에게 만세시위 계획을 알렸다. 송현근 목사는 김해진(金海鎭)의 집에 교회 간부를 소집하고, 3월 4일 사천시장에서 별도로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하지만 이 계획이 헌병보조원에게 발각되어, 김해진 등 10여 명이 붙잡혔다. 3월 4일 10시 합성학교 운동장에 모인 원장교회·반석교회·산수리교회 교인 등 약 1,000명은 원장교회 간부들과 함께 독립선포식을 거행하였다. 차병규(車炳奎)의 기도 이후 지석용(池錫湧)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임이걸은 독립선포식을 해야 하는 필요성에 대해 40분간 연설하였다. 이후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나팔수를 선두로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원장시장으로 행진하였고, 시장을 한 바퀴 돌고 다시 합성학교로 돌아왔다. 이때 최능현과 송현근이 사천시장 만세시위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관련자들이 체포되었음을 알리며 사천헌병주재소 유치장에 갇힌 동지들을 구하자고 호소하자, 시위대는 곧바로 사천시장으로 향하였다. 하지만 주재소장인 사토(佐藤實太郞)와 헌병보조원들이 잠복하고 있다가, 사천시장으로 들어서는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하였다. 이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격분한 시위대는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시위대의 강한 저항에 역부족이라 생각한 사토는 주재소에 몸을 숨기고 계속 총을 쏘았고, 헌병보조원들은 도망쳤다. 시위대는 주재소에 불을 지르고 도망가는 사토를 응징하였고, 헌병보조원 3명도 처단하였다. 사천시장 만세시위 이후 일제 군경의 강경 진압으로 19명이 희생되었고, 4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부상자들은 응급처치 후 평양으로 급히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이후 평양 헌병대는 일제 군경을 대거 동원하여 각 마을을 돌아다니며 만세시위 참여자를 색출하면서, 특히 기독교인 남자들을 중점적으로 검거하였다. 이때 40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체포되었고, 20여 일 동안의 취조 끝에 49명이 기소되었다. 당시 일제 군경의 검거를 피하여 한동안 집안에서 두문불출하며 은신하였고, 이후 평남 평양부 창전동(倉田洞)으로 이주하여 잡화점을 경영하였다. 하지만 결국 1926년 4~5월 경 평양경찰서에 붙잡혔다. 1927년 6월 23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방화, 소요, 살인죄로 징역 7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지만, 같은 해 10월 23일 평양복심법원에서 다시 징역 5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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