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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진

金光振

1897. 7. 15 ~ 1964.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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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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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의주(義州)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북도 의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광제청년단
  • · 대한통의부
  • · 정의부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관련 사건

  • · 차련관 의거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1897년 7월 15일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광평면(廣坪面) 청수리(靑水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김광해(金廣海)이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의주군 광평면 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 일본 경찰의 체포령으로 같은 해 4월 오동진(吳東振) 등과 함께 남만주(현재 랴오닝성) 관뎬현(寬甸縣)으로 건너갔다. 관뎬현에서 윤하진(尹河振)·장덕진(張德震)·오동진 등이 조직한 광제청년단(廣濟靑年團)에 가담하여, 1920년 7월 미국의회 의원단이 한반도에 방문하는 것을 계기로 일제의 주요 기관을 폭파시키는 단원으로 선발되었다. 임용일(林龍日)·안경신(安敬信)과 함께 폭탄을 휴대하고 평북 선천(宣川)에 들어가 거사 준비 공작 중 일본 경찰에 사전 정보가 탐지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24년 4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군사부 김동삼(金東三) 휘하의 군수과 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2월까지 그 직책을 수행하였다. 대한통의부는 기관지로 『경종보』를 발행하여 재만 한인의 민족정신 함양과 교육 계몽에 노력하였고, 만주 지역 친일 주구배 처단을 천명하였다. 1925년 6월 정의부(正義府) 군사부 별동대원으로 선발되어 이진무(李振武)·홍학순(洪學淳)·김인옥(金仁玉)·이창만(李昌萬)·오동락(吳東洛) 등과 함께 국내 일제 기관 파괴와 밀정 처단을 위한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각자 권총을 휴대하고 압록강을 건너 국내로 잠입하였다. 평북 선천군 산해면 산골에 당도하여 철산군 차련관(車輦館) 장날에 양조회사, 우편소, 주재소 등을 습격하기로 하였다. 차련관 뒷산으로 이동하여 목탄 굽는 촌부에게서 두루마기와 상복 등을 얻어 갈아입었다. 그해 7월 3일 이진무·홍학순·이창만과 함께 차련관 일본 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 경찰 4명을 처단하였다. 같은 날 이창만과 함께 주류제조업 영성상회(永成商會)에서 63원과 금시계 1개를 군자금으로 수령하였다. 다시 장터로 나와 군중에게 “우리는 만주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독립운동 단체 정의부 중앙군사부 별동대원으로서 우리 민족의 염원인 독립을 쟁취하러 온 것이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위험과 갖은 고난을 극복하고 오로지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고자 이곳 주재소를 습격하고 왜적을 몰살하였다”라고 연설한 다음 산속으로 철수하였다. 본영으로 돌아가던 길에 이진무·홍학순 등 6명과 함께 영변군 용산면, 의주군 월화면 주가곡 등 세 곳에서 일본 경찰 추격대와 충돌하여 격전을 벌였다. 그때마다 기민하게 몸을 피하여 한 달만에 무사히 귀환하였다. 1927년 2월 정의부 사령관 오동진이 군기를 쇄신하고 무장투쟁을 실시할 목적으로 조직한 의용군 체제 하에서 제1중대(중대장 이웅) 소대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9·18사변) 이후 광해라는 가명을 쓰며 중국 전역을 돌아다니다 광복 후인 1949년 귀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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