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익중
尹益重1896. 4. 27 ~ 1963. 2. 1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혁신단
- · 구국민단
- · 암살단
- · 신간회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구국민단 사건
- · 암살단 사건
- · 김상옥 의거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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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0) 1896년 (음)4월 27일 충청남도 홍성군(洪城郡) 장곡면(長谷面) 화계리(花溪里)에서 참봉(參奉) 윤태병(尹台炳)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명은 윤세중(尹世重)이다. 집안에서 한학을 배운 후 1916년경 서울의 사립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하였고, 개칭 교명인 휘문고보를 졸업하였다. 일설로는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1919년 3월 1일 경신학교(儆新學校) 2학년생인 동생 윤낙중(尹樂重)과 탑골공원의 독립선언서 선포식과 만세시위에 참여한 후 독립선언서 100여 장을 가지고 귀향하였다. 그리고 형 윤형중(尹衡重)·조카 윤의석(尹宜錫)과 함께 만세시위의 행동 강령을 만들어 인근 유지와 마을 주민들에게 만세운동 참여를 권유·설득하였다. 그 결과 장곡면에서는 4월 7일 매봉산[응봉산(鷹峰山)]에서 화계리·광성리(廣城里)·신풍리(新豊里) 주민 300여 명이 참여한 횃불만세위가 벌어졌다. 같은 해 4월에는 김상옥(金相玉)의 주창으로 서울 연지동(蓮池洞)에서 비밀결사 혁신단(革新團)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독립운동 선전지(宣傳紙)인 『혁신공보(革新公報)』의 간행에 적극 관여하였는데, 주필(主筆)이었다고도 한다. 1920년 5월 초순에는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특파원 김동순(金東淳)이 독립전쟁 준비자금 200만원 조달과 그 방편으로서의 대대적인 폭탄거사 및 일제 주구 암살 계획을 갖고 중국 지린(吉林)에서 서울로 들어왔다. 이웃 친구인 박승목(朴勝穆)의 소개로 김동순을 만나 인의동(仁義洞) 전우진(全宇鎭)의 집에 하숙하도록 알선하였고, 김상옥도 소개하였다. 이어서 김동순의 활동 계획을 듣고 의기투합하여 실행조직으로 암살단(暗殺團, 단장 김동순)을 결성하고 외교부장이 되었고, 6월에는 서기 신화수(申華秀)와 함께 암살단 취의서와 경고문·통고문을 작성하였다. 6월 하순 경기도 수원(水原)의 이득수(李得壽)와 박선태(朴善泰)가 여학생들을 포섭하여 구국민단(救國民團)을 비밀결사로 조직하고 독립사상 고취 목적의 선전활동을 펴다가 8월 초순에 경찰의 수사를 받았는데, 그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붙잡혔다. 같은 해 8월 24일부터의 미국 의원단 방한 때 출영할 조선총독과 정무총감을 암살하고 시민 대시위를 격발하려던 암살단의 거사계획도 예비검속 때문에 실행되지 못하고, 오히려 단서가 잡히면서 관련자로 지목되었다. 구국민단 사건으로 검사국에 송치된 후 1920년 10월 26일 예심종결 때 증거불충분으로 면소를 받았지만, 암살단 사건 관련으로 계속 구금되었다. 1921년 6월 21일 예심종결과 더불어 기소되었고, 같은 해 11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250일 산입)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1922년 8월 가출옥하고 낙향하여 광천면(廣川面) 광천리(廣川里)에 거주하며 『동아일보』 홍성지국장으로 일하였다. 얼마 후 12월 중순, 2년 전의 암살단 사건 때 경찰에 수배되자 중국 상하이(上海)로 도피했다가 12월 1일 서울로 잠입한 김상옥이 만나고자 한다는 서신을 동지 정설교(鄭卨敎)에게 받고, 상경해 재회하였다. 김상옥이 그 자리에서 부호들로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 자금을 받아내기 위해 폭탄 거사를 벌이려 한다는 말과 더불어 준비 비용 1,000원의 조달을 요청하자 승낙하고, 우선 50원을 제공하였다. 이어서 그 달 20일 경에 김상옥의 지시대로 낙원동(樂園洞) 서병두(徐丙斗)의 집을 찾아가 독립자금 헌납 요구서 및 영수증의 인쇄와 인장 조각을 의뢰하였고, 12월 28일 경에 비용 20원을 서병두에게 우송하였다. 1923년 1월 18일에는 거사 준비 추가 비용 100원을 광천공립보통학교 교사 이은영(李恩暎)에게 주고, 언니 이혜수(李惠受)를 통해서 김상옥에게 전달하도록 하였다.하지만 일본 경찰의 정보망에 밀입국 사실이 포착된 김상옥이 같은 해 1월 17일 삼판통(三坂通, 지금의 용산구 후암동) 격전을 거쳐, 1월 22일 새벽 은신처인 효제동(孝悌洞) 이혜수의 집에서 경찰대와 총격전을 벌이다 사망하였다. 그러자 이 일과 연루된 김한(金翰) 등 7명과 함께 경찰에 다시 붙잡혔다. 1923년 3월 13일 예심종결과 더불어 기소되었고, 5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고, 같은 해 10월 1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단기 1년 6월)을 다시 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다가 1925년 4월 11일 풀려났다. 1927년 8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신간회(新幹會) 홍성지회 부회장으로 재임하였다. 광복 이후 1946년부터 2년간 신한공사(新韓公社) 충남지사에서 근무하였다. 1949년 1월 국회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충청남도 조사부의 책임자로 선임되었고, 10월 4일 해체 시까지 조사부장으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 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영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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